한스 우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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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우프트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네덜란드 출신의 축구 지도자이다. 1992년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여 다이너스티 컵과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거두었으며, J리그에서도 주빌로 이와타, 교토 퍼플 상가,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등의 팀을 이끌었다. 2003년 우라와 레즈 감독 시절에는 J리그컵을 제패했고, 2013년에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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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우프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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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마리우스 요한 오프트 |
출생일 | 1947년 6월 27일 |
출생지 | 로테르담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선수 경력 | |
유소년 클럽 | SV DEH뮈스헨(네덜란드) |
유소년 클럽 | 페예노르트 U21 (1964–1967) |
클럽 | 페엔담 (1967–1970) |
클럽 | 캄뷔르 (1970–1974) |
클럽 | 헤이렌베인 (1974–1975) |
지도자 경력 | |
감독 | 네덜란드 U-21 (1976) |
코치 | 야마하 (1982, 어시스턴트) |
코치 | 마쓰다 (1984-1987, 어시스턴트) |
감독 | 마쓰다 (1987–1988) |
감독 | 일본 (1992–1993) |
감독 | 주빌로 이와타 (1994–1996) |
감독 | 교토 퍼플 상가 (1998) |
감독 | 우라와 레ッズ (2002–2003) |
감독 | 주빌로 이와타 (2008) |
수상 | |
AFC 아시안컵 | 우승 (1992) |
다이너스티컵 | 우승 (1992) |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 |
등재 | 마리우스 요한 오프트 |
2. 경력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6]
1976년에 네덜란드 유스 대표(유스 축구 육성 프로그램 담당) 코치로 취임했다. 일본과의 첫 인연은 이 네덜란드 유스 대표팀 스태프 시절로, 가쓰자와 가나메(시미즈히가시 고등학교)가 이끄는 일본 고교 선발팀이 유럽 원정을 했을 때 소개를 받아 돌봤다고 한다.
1982년 스기야마 류이치의 초청으로 당시 일본 축구 리그 (JSL) 2부의 야마하 발동기 (현 주빌로 이와타)의 2개월 단기 코치로 오퍼를 받아 취임, 1부 승격 및 천황배 우승에 기여했다. 1984년에 이마니시 가즈오의 초청으로 JSL 2부의 마쓰다 SC (현 산프레체 히로시마 F.C) 코치로 취임했다. 2년차인 1985년에 JSL 1부 승격을 이끌었고, 1987년에는 감독으로 취임하여 천황배 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1987-88 시즌에 클럽은 JSL 2부로 강등되었고, 우프트도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 후 네덜란드로 귀국하여 FC 위트레흐트의 매니징 디렉터를 맡았지만, 1992년, 외국인 최초로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여름에 다이너스티 컵 우승, 가을에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이끌어 일본 밖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서 일본 축구계 사상 첫 빅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이때 일본 대표팀의 활약이 J리그 개막과 맞물려, 매스 미디어가 크게 다루면서 사회 현상이 되었다. 1993년에 열린 월드컵 미국 대회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는 국민들의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켜 매 경기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본선 출전에 한 발짝 다가섰지만 이라크에 동점 골을 허용하여 출전을 놓쳤다(도하의 비극 참조).
그 후, 1994년부터 J리그의 주빌로 이와타, 1998년에 교토 퍼플 상가, 2002년부터 우라와 레즈 감독을 역임했다. 주빌로 이와타에서는 팀을 강호로 육성하여 재임 중 몇 차례 우승 경쟁에 참여했고, 주빌로 이와타 퇴임 다음 해에 주빌로 이와타가 우승했다. 교토 상가 FC에서는 오타케, 야마다, 모리야스, 이와모토, 구로사키 등을 적극적으로 보강했지만, 결과를 내지 못하고 월드컵 개최 중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임했다.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감독 시절 2003년에는 나비스코컵을 제패했다. 팀에 첫 타이틀을 안겨주었지만, 사장이었던 이누카이 모토아키와 지향하는 방향의 차이로 인해 퇴임(사실상 해임). 그 불만에서인지, 나비스코컵을 제패한 경기 후 기자 회견에서 퇴임을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다.
이후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정기적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소년 축구 지도를 하는 등, 현장의 최전선에서는 떠나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2008년 9월, 도중 해임된 우치야마 아쓰시를 대신하여 J2 강등 위기에 놓인 주빌로 이와타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주빌로 이와타에는 12년 만, 감독직 자체에도 5년 만의 복귀였다. 부진한 팀 상황에서 수비적인 전술을 펼쳤지만, 강등권을 벗어나지는 못했고, 시즌 16위로 베갈타 센다이 (J2)와의 플레이오프에 가게 되었다. 이 플레이오프를 통산 성적 1승 1무로 승리하며, 지상 명령이었던 J1 잔류를 달성했다. 프런트에서는 2009년 시즌의 연임을 요청했지만,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한다"고 프런트 개혁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같은 해로 다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J리그 통산 100승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2012년에 넬시뉴에게 추월당하기 전까지 J리그 외국인 감독 최다승이었다.
2013년, 일본 대표팀과 J리그 각 클럽에서 감독을 맡는 등 일본 축구 발전에 공헌한 인물로,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표창이 결정되었다.[7]
2. 1. 선수 경력
한스 우프트는 1967년 SC 페엔담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70년까지 활동했다. 1970년부터 1974년까지는 SC 캄뷔르에서, 1974년부터 1975년까지는 SC 헤렌벤에서 선수로 뛰었다.2. 2. 지도자 경력
한스 우프트는 1992년 5월부터 1993년 10월까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1992년 AFC 아시안컵에서 일본 대표팀을 이끌고 우승을 차지했다.그는 또한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마쓰다 SC 코치를 맡았는데, 실질적으로는 감독으로 팀을 지휘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는 마쓰다 SC의 감독을 역임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그리고 2008년 9월부터 12월까지 주빌로 이와타 감독을 맡았다. 1998년 2월부터 6월까지는 교토 퍼플 상가 감독을, 2002년 2월부터 2003년까지는 우라와 레즈 감독을 역임했다.
2. 3. 감독 통계
wikitable팀 | 기간 (시작) | 기간 (종료) | 기록 | ||||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
주빌로 이와타 | 1994 | 1996 | 126 | 68 | 0 | 58 | 54.0% |
교토 퍼플 상가 | 1998 | 1998 | 12 | 3 | 0 | 9 | 25.0% |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 2002 | 2003 | 60 | 26 | 10 | 24 | 43.3% |
주빌로 이와타 | 2008 | 2008 | 11 | 3 | 2 | 6 | 27.3% |
총합 | 209 | 100 | 12 | 97 | 47.8% |
'''일본'''
3. 주요 업적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개인'''
3. 1. 일본 대표팀
한스 우프트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1992년 AFC 아시안컵[5], 1992년 다이너스티컵[5], 1993년 아프리카-아시아 네이션스컵에서[5]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감독으로 2003년 J리그컵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5]
3. 2.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1992년 AFC 아시안컵, 1992년 다이너스티컵, 1993에서 일본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5] J리그컵에서 2003 우승을 하였다.[5]
3. 3. 개인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2013년에 헌액되었다.[5]
4. 지도 철학 및 평가
일본 대표 감독 시절에는 전술을 이해시키기 위해 단순한 키워드를 많이 사용했다. 수비 면에서는 "DF・MF・FW의 '''쓰리 라인'''을 '''컴팩트'''하게 유지하고, 선수 간의 거리를 좁힌다 ('''스몰 필드''')", 공격 면에서는 "볼 소유자의 주위에서 '''트라이앵글'''(삼각형의 패스 코스)을 만들면서 패스를 돌린다", '''사이드 어택'''으로 피치를 넓게 사용한다", FW의 '''타겟 맨'''을 활용한다", 연계 면에서는 '''코칭''' (소통)이나 '''아이 컨택트'''(눈빛)로 의사소통을 한다", '''태스크'''(역할)나 '''디시플린'''(규율)을 지킨다" 와 같은 약속들을 선수들에게 가르쳤다.
그것들은 특별한 지도가 아니라, 오프트 재팬의 주장을 맡았던 하시라타니 테츠지는 "유럽에서는 육성 레벨에서 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8]"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프트가 전한 말에 의해 "그 전까지는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명확하게 보이게 되었다. 팀으로서 플레이의 이미지를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9]", "큰 변화로는, 강한 상대를 상대로도 패스를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9]"라고 말했다. 오프트의 말은 축구 붐을 타고 미디어를 통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J리그 클럽 감독으로서의 오프트는 기본적으로 포지션별 역할을 명확히 하고, 좋게 말하면 선수들에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게 하는 기초적인 축구를, 나쁘게 말하면 공격 상황에서도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 앞으로 나서는 선수를 적게 하는 등, 소극적인 전술을 선택했다. 이와타나 우라와에서는 MF가 FW를 추월하거나, 원투 패스를 금지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FW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MF가 없애는 것의 단점, 그리고 FW와 MF의 포지션, 밸런스를 선수 스스로가 몸에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레귤러 멤버를 고정시키는 경향이 강한 감독이기도 하다. 일본 대표 감독 시절에는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 직전에 왼쪽 사이드 백인 토나미 사토시가 부상으로 결장하여, 백업 멤버를 제대로 고정시키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도하의 비극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그 외 우라와 감독 시절에는 특히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좀처럼 선수 교체를 하지 않는 감독이었고, 교체 쿼터를 남겨둔 채 지는 경기도 있을 정도였다 (둘 다 당시 멤버는 레귤러와 서브의 실력 차가 컸던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세대 교체로 황금 시대를 지탱했던 베테랑이 빠지고, 젊은 선수 중심으로 바뀌었던 이와타로의 복귀 후에는 레귤러와 서브의 실력 차가 없어 적극적인 선수 교체를 보였다. 또한 젊은 선수들의 적극적인 기용으로 성장을 촉진하여, 이와타의 J1 잔류의 원동력이 되었다.
오프트가 획득한 타이틀은 일본 대표로서 AFC 아시안컵 1992, 아프로-아시아 선수권 대회 1993, 우라와 레즈로서 첫 타이틀인 2003년 나비스코컵 등이 있으며, 이와타나 우라와의 이후 황금 시대와 일본의 월드컵 첫 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지도자로서서는 우수하지만,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교체 쿼터를 남겨둔 채 경기를 끝내는 일도 종종 있었던 점에서, 순수한 승부사는 아니었다는 시각도 있다[10]。
4. 1. 긍정적 평가
한스 오프트는 일본 대표 감독 시절, 수비에서는 "DF・MF・FW의 '''쓰리 라인'''을 '''컴팩트'''하게 유지하고, 선수 간의 거리를 좁힌다 ('''스몰 필드''')"는 개념을 사용했다.[8] 공격에서는 "볼 소유자의 주위에서 '''트라이앵글'''(삼각형의 패스 코스)을 만들면서 패스를 돌린다", '''사이드 어택'''으로 피치를 넓게 사용한다" 등의 전술을 활용했다.[8] 이러한 오프트의 지도는 당시 일본 대표팀 주장이었던 하시라타니 테츠지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육성 레벨에서 하고 있던 것"이었다.[8] 하지만 오프트의 지도를 통해 "그 전까지는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명확하게 보이게 되었다. 팀으로서 플레이의 이미지를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한 상대를 상대로도 패스를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9]J리그 클럽 감독으로서 오프트는 선수들에게 포지션별 역할을 명확히 하는 기초적인 축구를 가르쳤다.[10] 이와타나 우라와에서는 MF가 FW를 추월하거나, 원투 패스를 금지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는 FW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선수 스스로 포지션 밸런스를 익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0]
오프트는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AFC 아시안컵 1992, 아프로-아시아 선수권 대회 1993 우승을 이끌었고, 우라와 레즈 감독으로 2003년 나비스코컵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10] 이러한 성과를 통해 이와타나 우라와의 이후 황금 시대와 일본의 월드컵 첫 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10]
4. 2. 부정적 평가
한스 오프트는 선수들에게 전술을 이해시키기 위해 "쓰리 라인", "컴팩트", "스몰 필드", "트라이앵글", "사이드 어택", "타겟 맨", "코칭", "아이 컨택트", "태스크", "디시플린"과 같은 단순한 키워드를 많이 사용했다.[8][9] 이러한 키워드들은 하시라타니 테츠지가 언급했듯이 유럽에서는 육성 레벨에서 이미 다루던 내용이었지만,[8] 명확하지 않았던 개념들을 명확하게 만들어 팀 플레이의 이미지를 그릴 수 있게 하고, 강한 상대를 상대로도 패스를 돌릴 수 있게 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9]J리그 클럽 감독으로서 오프트는 선수들에게 포지션별 역할을 명확히 하는 기초적인 축구를 가르쳤지만, 공격 상황에서도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 소극적인 전술을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와타나 우라와에서는 MF가 FW를 추월하거나 원투 패스를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선수 스스로 포지션 밸런스를 익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오프트는 레귤러 멤버를 고정시키는 경향이 강했다. 일본 대표 감독 시절, 토나미 사토시의 부상으로 인한 백업 멤버 부재는 도하의 비극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우라와 감독 시절에는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선수 교체를 하지 않거나 교체 쿼터를 남겨둔 채 경기를 끝내는 경우가 있어, 순수한 승부사는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10] 하지만 이와타 복귀 후에는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세대 교체를 이끌었다.
5. 기타
1982년, TV 해설자였던 가와부치 사부로(당시 일본 축구 협회 강화 위원장)는 야마하의 경기 변화에 놀라 조사했고, 그 결과 오프트의 지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 감독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분석한 가와부치는 1991년 9월, 네덜란드에서 오프트와 회담을 가졌다. 데트마르 크라머 초빙 당시 언어 장벽과 축구 스타일 차이로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시대도 변했고, 스즈키 노리아키라는 뛰어난 통역도 있으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가와부치의 설득으로 한스 오프트는 일본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승인되었다.
대표팀 감독 취임 기자 회견에서 "저는 월드컵에 일본 대표팀을 출전시키기 위해 감독으로 취임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일본 축구 암흑기를 겪어온 기자들은 믿지 않았고, 심지어 실소를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표팀이 단기간에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자, 언론은 '''오프트 매직'''이라고 칭송했다.
다이너스티컵 결승전 한국전에서는 경기 전 라커룸에서 한국 선발 멤버가 적힌 종이를 뭉쳐 바닥에 던지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한국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선수들을 고무시켰다.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도하의 비극) 직후, 사우디 아라비아로부터 감독 취임 요청이 있었다는 사실을 NHK "일본 축구 50년" 프로그램에서 밝혔다.
일본 대표팀 감독 시절, 핵심 선수였던 라모스 루이와는 훈련 방법이나 선수 기용 문제로 자주 충돌했다. 오프트가 훈련 중 선수를 부를 때 휘파람을 불자, 라모스는 "우린 당신의 개가 아니야!"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오프트가 취임 초 "'''너와 카즈에게 자유는 주지 않겠다'''"고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통역 실수였고, 실제로는 "일본 대표팀은 국가의 대표이며,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특히 라모스와 같은 창조적인 선수는 그 힘을 팀을 위해 활용할 책임이 있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오프트와 라모스의 대립은 선수 개개인의 역할(태스크)과 측면 공격을 중시하는 오프트와 자유분방한 요미우리 클럽식 중앙 돌파를 선호하는 라모스의 축구관 충돌이기도 했다. 라모스의 감독 비판이 잡지에 실리기도 했고, 오프트가 라모스를 불러 해명하는 일도 있었으며, 주장 하시라타니 고이치가 라모스를 설득하기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라모스는 아시안 컵이 끝날 무렵 "'''오프트를 남자답게 만들고 싶다'''"고 공언했다. 라모스는 나중에 "들개 같은 나까지 품어주고 버리지 않았다. 일본 축구를 강하게 만든 것은 틀림없이 오프트다. 그래서 남자답게 만들고 싶었다"고 회고하며, 현재는 존경하는 인물로 오프트를 자주 언급한다.
6. 저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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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rsss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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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us Johan OOFT
https://www.jfa.j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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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育将・今西和男】のちの日本代表監督ハンス・オフトを招聘した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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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日本代表監督のオフト氏らが殿堂入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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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サッカーが韓国コンプレックスを克服した日 蘇る記憶、オフトが刻んだアジア制覇の原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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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ーハの背番号10、秘めた思い> ラモス瑠偉 「俺はオフトを男にしたかった」
http://number.bu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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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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